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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헙

《혈룡기》 제9화 – 불꽃과 얼음, 첫 대치

by WhateverYouDo 2025. 9. 29.

 

──매혹의 칼날은, 검보다 날카롭다.

 

무림맹 안의 뒷뜰.
달빛 아래, 향나무가 짙게 풍겼다.

그곳에,
화란이 서 있었다.

붉은색 옷자락은 바람에 흩날리고,
그녀의 어깨 너머엔
은은하게 열꽃 문양이 살아 숨 쉬었다.

그리고──
그 앞에 청류가 나타났다.

푸른 옷에 단정한 검.
차가운 눈매는 밤빛에 더 선명했다.

 

“네가 먼저 왔네, 청류.”

“널 기다린 건 아니야.”

화란은 웃었다.
그 웃음엔,
날카로운 독이 숨어 있었다.

“무린에게… 향수 뿌렸지?”

“……무슨 말이지?”

“그 애가, 오늘 아침 내 방을 지나쳤을 때
그 몸에서 너의 향기가 났어.”

 

청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는 전날 밤,
무린의 검 손질을 도와줬다.
살결이 닿았고,
그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리고…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 귀를 기울이는군.”

“난 그 아이가 내 품에 안겨서
어떻게 숨을 쉬는지까지 기억하거든.”

 

화란이 다가왔다.

“네가 아무리 그에게 다가가 봐도,
그의 몸은 이미 내 품에 기억되어 있어.”

청류는 검을 꺼내 들었다.

“몸이 기억하든, 향이 남든…
내가 가진 건 ‘시간’이야.
매일 그의 옆에 설 수 있는 권리.”

“하하… 역시 정파는 재미없다.
가슴 대신 검으로 말하려 드니까.”

 

그 순간,
화란의 손끝이 청류의 뺨 가까이를 스쳤다.

차가운 손끝.
하지만 그 속엔 치명적인 열기가 있었다.

“너…
그 애랑 입을 맞춘 적은 있어?”

청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란이 속삭였다.

“나는 했어.
그 애가 내 입술 위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들었지.”

 

정적.

그리고──
청류는 검을 수납했다.

“다시 그 얘길 꺼내면,
그땐 검으로 답하지 않겠어.”

 

그날 밤,
무린은 자신의 거처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와 있었어.”

화란이었다.

“청류랑 다퉜어.”

“…또?”

“이번엔 눈빛으로만.”

그녀는 무린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를 훑으며 말했다.

“입맞춤, 한 번 더 할래?”

 

그 순간──
문이 또 열렸다.

“무린, 나 할 말이………”

청류였다.

눈이 마주쳤다.
화란과 청류.

둘 사이엔
모든 말이 필요 없었다.

 

“미안, 청류야.”

화란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먼저 온 여자가 이기는 거야.”

청류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럼… 다음엔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그리고 사라진 청류의 뒷모습을 보며
무린은 침묵했다.

화란이 다시 속삭였다.

“그 아이…
너무 깨끗해서 망가뜨려보고 싶어져.”

무린은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나는… 이미 망가진 여자야.
그러니까, 날 더 안아줘.”

 

그날 밤.
무린의 방에선
창호지 너머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신음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질투의 불,
승부의 열기,
여자의 소유욕이 만들어낸…
밤의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