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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헙

[외전] 화란 – 칼날 위 입술

by WhateverYouDo 2025. 9. 29.

 

──칼보다 날카로운 건, 여자의 입술이다.

 

비가 내렸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물비린내.
세상은 젖었고, 무림은 조용했다.

무린은 홀로 앉아 있었다.
구천객잔.
낡은 목재 의자, 삐걱거리는 천장, 식지 않은 술 한 사발.

그는 취하지 않았다.
술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머리까지 닿지 않았다.
머릿속은 아직… 천룡세가의 대문 앞에 있었다.

“적장자? 웃기지 마라.”

 

그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돌.
피.
자존심.

그의 이마엔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고,
그 눈빛은 더 깊어져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바람처럼.
아무 소리도 없이.

그리고 그 문턱을 넘어선 건… 화란.

검은 우비, 붉은 허리끈.
머리는 젖었고, 눈은 젖지 않았다.

“또 혼자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그 속엔 짓궂음과 연민, 갈증이 섞여 있었다.

무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감시인가.”

“감시라기엔… 너무 가까이 와버렸지.”

화란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축축한 옷자락이 나무 의자에 닿으며 젖었다.
무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날 따라다니는 이유, 솔직하게 말해라.”

“음…”
화란은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멋있으니까?”

“…사파의 요괴가 멋있는 남자를 쫓는다고?”

“요괴도 외로워.
특히… 칼처럼 살아온 여자일수록,
때로는 칼보다 더 단단한 걸 붙잡고 싶거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무린의 손등에 닿았다.

무린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넌 내 목을 따러 온 게 아니었나.”

“맞아.”
화란은 속삭였다.
“근데 네 눈을 보고선,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정적.
불안정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테이블에 겹쳐졌다.

화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린의 옆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목덜미.

“칼은 늘 추워.
하지만 사람의 입술은… 따뜻하지.”

무린의 몸이 긴장했다.
숨결이 가까워졌고,
그녀의 머릿결에서 비의 냄새가 났다.

화란은 그의 뺨에 입술을 댔다.
그냥 살짝.
피부를 읽듯.

무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숨소리만이 귀에 닿았다.

“입맞춤은 칼처럼 베지 않아.
하지만 심장은… 더 잘 베더라.”

그녀가 이마를 마주댔다.
눈과 눈이 맞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그 순간.

무린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입술이 닿았다.
짧고,
조용했고,
하지만 확실했다.

불이 붙은 건 혀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화란은 눈을 떴다.
무린은 입술을 떼며 말했다.

“…다음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입 맞춘다.”

그녀는 웃었다.
입술 끝이 떨리며 속삭였다.

“그래… 그래야 나도… 설레지.”

 

그리고 그 밤.
객잔엔 두 개의 그림자가 창가에 기대 있었다.

검은 바람.
붉은 눈동자.
그리고…
이제 피만큼 뜨거워진 입술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