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없다면, 무너뜨릴 이유는 충분하다.
남강성 청화현, 천룡세가.
사람들은 말했다.
“천룡세가는 예의를 중시하고, 정의를 수호하며, 무림맹의 중심이자 의협의 상징이다.”
거짓이었다.
무린이 본 것은,
높은 담벼락과 그 안에 세워진 권위와 오만뿐이었다.
무린은 걸었다.
천룡세가의 대문 앞.
벗겨진 짚신, 피가 말라붙은 손등,
그리고 등에 멘 검.
지나는 이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이는 무시했고,
어떤 이는 경계했다.
하지만 그는 그 눈빛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이 자들이…
언젠가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누구냐.”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물었다.
무린은 고개를 들었다.
“이 집의 어른을 만나고 싶다.”
“하하, 허름한 떠돌이 하나가 당주를 찾는다고?”
수문장이 코웃음을 쳤다.
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이 집의 피를 가졌다.”
그 순간, 칼자루에 손이 올랐다.
수문장이 움찔했다.
그의 눈에서 무언가 짐승 같은 살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웃었다.
“미친놈 같군. 당장 꺼져라.”
무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꺼낸 옥패를 내밀었다.
그 문양,
천룡세가의 적장자에게만 주어지는 ‘천룡옥패’.
수문장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눈빛이 굳어졌다.
“어디서 훔친 거냐.”
“…이건 내 것이었다.”
“웃기지 마라. 적장자는 이미 죽었다. 십 년 전에 말이다.”
잠시 후,
안에서 사내 하나가 나왔다.
천룡세가의 집사.
나이 지긋한 그 남자는 무린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눈.
그 피빛 눈은, 오래전에 본 적 있군.”
무린은 그를 노려보았다.
“넌… 날 아는가.”
“네 아비는 검을 쥐고 죽었고,
네 어미는 울지도 못하고 사라졌지.
넌 살아남았구나.”
“…그럼, 왜 바꿨지.”
“명령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천룡의 피는… 때로 무림을 불태울 불씨가 되니까.”
“그래서… 날 천한 집안에 버렸나?”
“살리기 위해서였다.”
집사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돌려놔라.
난 돌아왔다.”
무린은 천룡옥패를 바닥에 놓았다.
하지만 그 순간,
뒤편에서 사내들이 달려와 그를 둘러쌌다.
검을 든 채.
“뭐지?”
무린이 칼자루에 손을 얹자,
뒤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 자는 위조범이다!
도적떼와 결탁해 천룡세가를 속이려 한다!”
누가 봐도 조작된 상황.
무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나는 이 집의 피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피가 먼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천룡세가의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대문 앞에서 쫓겨났다.
마치 쓰레기처럼.
그를 향해 돌멩이가 날아왔다.
그 돌은 이마를 스쳤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올려보았다.
검붉은 색.
뜨겁고, 끈적한 피.
‘좋아.
너희가 날 거부했다.
그럼… 내가 너희를 꿇게 만들겠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칼은 여전히 무거웠고,
가슴은 더 뜨거웠다.
그리고,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던 시선 하나.
화란.
숲 그늘 아래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쫓겨나는 남자도… 꽤 멋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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