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흔들렸지만, 눈은 부정하고 있었다.
무림맹 연회.
정파와 사파, 황실의 그림자까지 드리우는
연중 단 한 번의 무림 공정(公正)의 밤.
여기 모인 자들은 전부 고위 가문, 대문파의 후계자들이었다.
검이 아닌 피로 증명되는 자리.
명분보다 배경과 정치력이 더 중요한 밤.
그날 밤,
청류는 하늘색 옥갑(玉甲)을 걸치고 등장했다.
정갈한 검은 머리를 높게 묶고, 정파 3대 무공 중 하나인 '청명류풍검법'의 상징인 푸른 인장을 달고 있었다.
눈빛은 차가웠고,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맹주의 딸이다.”
사람들이 속삭였다.
“청류 소협이래.”
연회장 뒤편,
하인처럼 검은 옷을 걸치고 벽을 등지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천무린.
그는 이름을 숨기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숨어 있었다.
손엔 잔이 들려 있었고,
눈은 연회장 중앙을 조용히 훑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청류를 스쳤을 때──
청류도, 그 시선을 느꼈다.
"저 하인, 누구지?"
청류가 조용히 묻자
옆의 부관이 대답했다.
“명부엔 없는 인물입니다. 뒷문으로 잠입한 듯합니다.”
“경비는 뭘 하고 있지?”
청류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정복을 입은 그녀는, 그 순간 연회장의 중심보다 더 강하게 빛났다.
무린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고,
청류는 그 눈빛에서 검의 날을 보았다.
“여긴 초대받지 않은 자의 자리가 아니다.”
청류는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와는 달리,
가슴 한켠이 미세하게 쿵 하고 울렸다.
‘왜… 눈을 피하지 않지?’
그는 말했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사라져야 할 이유도 없지.”
“…이름은?”
“없는 게 낫다.
넌 이름을 듣고 사람을 판단할 테니까.”
청류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대답은 무례했다.
하지만, 그 무례함에 당한 건 자신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대가 어디서 왔든 간에,
여긴 피로 평가받는 자들의 무대다.
하인의 손으론 검을 쥘 수 없다.”
“…검을 쥐는 건 손이 아니라, 마음이다.”
무린의 대답은 짧았고,
청류는 처음으로 그 대답에 무력감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순간,
연회장 뒤편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화란.
술잔을 들고, 웃고 있었지만
그 눈엔 웃음이 없었다.
“하인 주제에… 여잘 두 번이나 훔쳐보네.”
청류는 돌아섰다.
하지만 걸음을 떼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검을 휘두르던 엘리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서 그날의 눈빛을 빼앗아 간 적 없었다.
하지만 이름 모를 하인의 눈빛 하나에
그녀의 균형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천무린은 사라졌다.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하지만 청류는 다음 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검을 들고, 피를 흘리며…
자신을 구해주는 그 사내의 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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