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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헙

[외전] 화란 – 붉은 실, 검은 손끝

by WhateverYouDo 2025. 9. 29.

──사랑이란 말은 쓰지 않아도, 피부는 먼저 반응한다.

 

불빛은 낮고, 바람은 서늘했다.
화란은 그 바람 위에서 춤을 추듯 걸었다.
삼정객주가 불타던 날, 그녀는 불길의 흔적만 보고도 그 남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천무린.
원래 이름이든, 지금의 이름이든,
그에게선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검과 피와… 버려진 짐승의 냄새.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남자였다.

그날 밤,
그녀는 그가 몸을 숨긴 폐가 안에 들어섰다.
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는 검을 품은 채,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후후…”

화란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숨소리는 얕고, 땀 냄새는 진했다.

사내가 전투 직후 흘린 냄새는 언제나 진하다.
공포, 아드레날린, 그리고 피.
그 모든 게 한데 섞여,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이마 위를 쓰다듬었다.

스르륵.

그 순간, 무린의 눈이 떠졌다.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칼끝은 그녀의 목 앞에서 멈췄다.

“…죽고 싶냐.”

무린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칼은 그녀의 피부를 살짝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어머, 칼이 이렇게 가까운데… 떨리지가 않네?”

무린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 더 다가왔다.

가슴이 닿을 듯 말 듯,
입김이 그의 턱 끝에 닿았다.

“사파의 요괴… 화란이냐.”

“기억했네. 기뻐해야겠어?”

“…왜 왔지.”

“궁금했거든. 어떤 남잔지.”
화란은 그의 칼끝을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칼날에 손가락이 베였다.
피가 맺혔다.

그 피를 그녀는 천천히 핥았다.
혀끝이 붉었다.

 

무린의 눈이 어두워졌다.
입술이 말라붙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한 번, 만져보고 싶었어.”

“뭐를?”

화란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의 피.
그리고… 그 피가 뛸 때 어떤 눈빛이 나오는지.”

그녀는 그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그리고 더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알아? 내가 당신의 첫 여자일 수도 있잖아.”

그 순간,
무린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천천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숨이 가까워졌다.
땀이, 체온이, 피 냄새가 뒤섞였다.
화란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
하지만 오늘은…
그 칼보다, 네 손이 더 궁금하네.”

무린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하지만 그건 욕망이 아닌 확인이었다.
이 여자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정적.
그리고…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

“지금은 아니다.”

화란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다음에 와도 돼?”

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아챘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어떤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는 것.

 

그날 밤,
화란은 옷깃을 여미며 나왔다.
아직 키스도, 손길도 없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와 가장 깊은 온도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언젠가, 날 칼이 아닌 손으로 붙잡게 될 거야.”

 

그리고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엔, 무림맹 연회.
공식적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