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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10

[외전] 화란 – 붉은 실, 검은 손끝 ──사랑이란 말은 쓰지 않아도, 피부는 먼저 반응한다. 불빛은 낮고, 바람은 서늘했다.화란은 그 바람 위에서 춤을 추듯 걸었다.삼정객주가 불타던 날, 그녀는 불길의 흔적만 보고도 그 남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천무린.원래 이름이든, 지금의 이름이든,그에게선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검과 피와… 버려진 짐승의 냄새.그리고…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남자였다.그날 밤,그녀는 그가 몸을 숨긴 폐가 안에 들어섰다.문은 잠기지 않았다.그는 검을 품은 채,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후후…”화란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의 숨소리는 얕고, 땀 냄새는 진했다.사내가 전투 직후 흘린 냄새는 언제나 진하다.공포, 아드레날린, 그리고 피.그 모든 게 한데 섞여,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2025. 9. 29.
《혈룡기》 제3화 – 봉인된 장롱 속 편지 진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피는 다 알고 있었다. 주막은 불타 사라졌다.새벽빛이 마당 끝, 검게 그을린 돌기둥에 떨어졌다.천무린은 아무 말도 없었다.몸엔 타다 만 연기가 밴 냄새가 남아 있었다.손에 쥔 검은 피에 젖어 무겁게 느껴졌고, 가슴 안은 한없이 가벼웠다.세 명의 시체는 태웠다.그 중 한 명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무린은 망설이지 않았다.“피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그게 어릴 적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었다.잊은 줄 알았던,검을 휘두르던 꿈속 그 소년의 맹세. 무린은 남쪽 굽은 길을 따라 걸었다.그는 누군가의 눈에 띄면 안 됐다.몸은 피에 젖었고,얼굴엔 그을음이 얼룩져 있었다.하지만 눈은 말갛게 떠 있었다.어둠을 꿰뚫는 눈, 그건 더 이상 하인의 것이 아니었다.그는 천룡세가의 피였다.그리고 .. 2025. 9. 21.
《혈룡기》 제2화 – 피로 물든 밤 검은 아직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검이었다. 밤이었다.별은 없었다.바람도 숨을 죽인 밤.삼정객주는 닫혔다.죽은 자의 피는 마당 흙 속에 스며들었고,살아남은 자는 그 피 위를 걸었다.린천. 아니, 천무린.그는 불 꺼진 방 안에서 나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옥패는 차가웠고, 편지는 눅눅했다.모든 진실은 그 안에 있었다.'천무린… 그게 내 이름이었다면… 왜 난 린천으로 살아야 했지?'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심장은, 단 한 방향으로만 뛰고 있었다.복수.피는 피를 부른다.죽은 자들의 마지막 비명은 밤새 귓가를 맴돌았다. 문이 삐걱 열렸다.린천은 상자를 덮고,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문 틈 사이로 불쑥 들어온 인물.등에 검을 멘 남자.보통 사내가 아니었다.“너, 린천이지.”그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한.. 2025. 9. 21.
《혈룡기》 제1화 – 주막집 하인의 피 피는, 언젠가 주인을 찾는다.피가 향하는 칼끝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취연촌.지도에도 없는 마을.산 속 바위 틈에 낀 듯한 촌락.그곳에 ‘삼정객주’라 불리는 허름한 주막 하나가 있었다.주막은 오래됐고, 사람은 지쳐 있었다.지붕에 구멍이 나 비가 새고, 주인은 술에 절어 살았으며, 하인은… 인간 대접도 받지 못했다.그 하인의 이름은 린천.몸은 컸지만, 말은 적었다.등은 굽었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누구에게도 눈을 맞추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부르지 않았다.“거기! 물!”손님이 고함을 질렀다.정파 복장을 입은 사내였다.검은 띠에 붉은 자수. 무림맹 제자란 표시다.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곧 드리겠습니다.”말은 정중했으나, 눈빛은 싸늘했다.그 눈빛을 본 사람은 없다.그가 고개를 든 적이 없.. 2025.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