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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헙

《혈룡기》 제2화 – 피로 물든 밤

by WhateverYouDo 2025. 9. 21.

검은 아직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검이었다.

 

밤이었다.
별은 없었다.
바람도 숨을 죽인 밤.

삼정객주는 닫혔다.
죽은 자의 피는 마당 흙 속에 스며들었고,
살아남은 자는 그 피 위를 걸었다.

린천. 아니, 천무린.

그는 불 꺼진 방 안에서 나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옥패는 차가웠고, 편지는 눅눅했다.
모든 진실은 그 안에 있었다.

'천무린… 그게 내 이름이었다면… 왜 난 린천으로 살아야 했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심장은, 단 한 방향으로만 뛰고 있었다.

복수.

피는 피를 부른다.
죽은 자들의 마지막 비명은 밤새 귓가를 맴돌았다.

 

문이 삐걱 열렸다.

린천은 상자를 덮고,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문 틈 사이로 불쑥 들어온 인물.

등에 검을 멘 남자.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너, 린천이지.”

그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한 마디만으로도 살기가 배어 있었다.

린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막의 하인 치곤 눈빛이 다르더군. 여자를 지켜보다니, 정체가 뭐지?”

“여자?”

“네 양어미 말이야. 마지막에 네 이름을 불렀지. 감히 주인을 사랑한 하녀가 되었나 했는데… 혹은…”

그 순간,
린천의 손은 이미 대야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검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억이 있었다.
죽창을 휘둘렀던 어린 시절의 꿈, 검을 베던 환상.
그게 이제 그의 몸 안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내가 칼을 뽑았다.
쇳소리가 방 안을 가르며 퍼졌다.

“죽어라, 천룡의 피.”

린천의 눈이 반짝였다.
말은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대야가 사내의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검은 더 빨랐다.

팍!

대야가 쪼개졌다.
쇳조각이 튀었다.
린천은 뒤로 굴렀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손에서 피가 났다.
하지만 그 피는 뜨겁고, 진했다.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살 의지는 있군. 하지만 넌 하인이다. 검도 모르는 놈.”

린천은 조용히 중얼였다.
“…너는 칼을 휘두른다. 난… 칼이 된다.”

그리고,
그는 달려들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내의 칼끝은 비틀렸고,
린천의 손에 쥔 조각은 사내의 눈을 향해 들어갔다.

피.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눈 한쪽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 이 자식…!”

린천은 달려가서 사내의 손목을 꺾었다.
그 칼을 빼앗아 땅에 내리꽂았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또 다른 인기척.

두 명.

그들은 말없이 방 안을 내려다봤다.
린천의 발밑에는, 눈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자가 있었다.

“임무 실패군.”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강조다.”

두 개의 칼.
두 명의 자객.
피 냄새는 이제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린천은 숨을 고르며 칼을 들었다.
그 손이 떨리지 않는다는 걸,
자신이 놀라고 있었다.

‘이게… 나였던 건가?’

살기는 진했고,
심장은 조용히 뛰고 있었다.

그는 전진했다.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었다.

몸을 베었다.
팔을 꺾었다.
칼이 어깨를 지나 가슴을 뚫었다.

처음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동작들.
이제는 현실이었다.

 

세 명의 시체가 방 안에 쓰러져 있었다.
피는 다시 마당으로 번졌다.
그 위에,
린천은 혼자 서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인이 아니었다.
그는,
피로 태어났고 피로 돌아온,
천무린이었다.

 

그날 밤,
불길은 마을을 삼켰다.
주막은 타올랐다.
그리고 모든 증거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말했다.

“린천? 그놈은 죽었지. 주막에서 같이 타 죽었다던데.”

 

하지만 진실은 불 속에서 걷는 한 남자였다.
그는 이제
세상을 향해 칼을 꺼내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