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언젠가 주인을 찾는다.
피가 향하는 칼끝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취연촌.
지도에도 없는 마을.
산 속 바위 틈에 낀 듯한 촌락.
그곳에 ‘삼정객주’라 불리는 허름한 주막 하나가 있었다.
주막은 오래됐고, 사람은 지쳐 있었다.
지붕에 구멍이 나 비가 새고, 주인은 술에 절어 살았으며, 하인은… 인간 대접도 받지 못했다.
그 하인의 이름은 린천.
몸은 컸지만, 말은 적었다.
등은 굽었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누구에게도 눈을 맞추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부르지 않았다.
“거기! 물!”
손님이 고함을 질렀다.
정파 복장을 입은 사내였다.
검은 띠에 붉은 자수. 무림맹 제자란 표시다.
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드리겠습니다.”
말은 정중했으나, 눈빛은 싸늘했다.
그 눈빛을 본 사람은 없다.
그가 고개를 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 한 사발을 들고 갔을 때, 사내는 일부러 물을 흘렸다.
대야는 기울었고, 물은 사내의 옷을 적셨다.
“이런! 하인 주제에!”
퍽!
따귀가 날아왔다.
린천의 얼굴이 돌아갔다.
피가 입술 끝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술을 훔치고, 대야를 다시 들었다.
그를 바라보던 주막 주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였다.
“하인은 맞아야 똑바로 서지.”
밤이 되었다.
등잔불이 깜빡였고, 술병은 비워졌다.
주막은 조용했다.
주인은 술에 취해 쓰러졌고, 여인은 마당 끝에 앉아 있었다.
린천은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을 자면 안 되는 밤이란 걸, 본능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발걸음을 죽이고 마당을 돌았다.
뒤뜰로 가는 길.
그곳에서 들려온 속삭임.
“그 아이는 안 돼… 그 피는 건드리지 말아야 해…”
양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곧 사내의 거친 외침에 묻혔다.
“입 다물어. 우린 10년을 기다렸어. 천룡의 피는, 우리 몫이야.”
퍽!
툭.
몸이 쓰러지는 소리.
숨이 멎는 소리.
그리고 피비린내.
린천은 숨을 죽였다.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빗자루 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감촉.
검(劍) 같았다.
어릴 적 꿈속에서 수없이 휘둘렀던 그것.
기억나지 않는 기억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양부는 방 안에서 숨져 있었다.
양어머니는 마당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사내는 없었다.
무림맹의 수사관은 말했다.
“도적들의 소행이다. 동정할 수는 있으나, 조사할 수는 없다.”
그 말은 곧 입 다물고 살아라라는 뜻이었다.
린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피 묻은 마당을 치웠다.
그날 밤,
그는 방 한구석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양어머니가 어릴 적 말했었다.
“이건… 정말 마지막 순간에 열어야 해. 넌… 넌 언젠가 그걸 알아야 해.”
뚜껑은 잘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있었고, 녹이 슬어 있었다.
하지만 린천은 그것을 부쉈다.
상자 안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낡은 옥패.
그리고,
피 묻은 편지 한 장.
『천룡의 피는 죽지 않는다.
진짜 검은, 언제나 버림받은 손 안에 있다.
…내 아들, 천무린.』
그 글귀를 읽는 순간,
린천은 알았다.
그의 이름은 린천이 아니었다.
그는,
천룡세가의 적장자──천무린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었다.
검은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몰랐지만,
그의 손과 심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 돌아왔다.
검이 돌아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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