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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기》제13화 – 누가 무림을 이끌 자격이 있는가 무림맹 회의당의 공기가눈에 보일 만큼 탁했다.며칠째 이어지는 청류의 실종.그 빈자리가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회의당은 점점 ‘정무’가 아닌 ‘정치’의 장이 되고 있었다. “무인(武人)은 감정에 흔들려선 안 됩니다.”백운 장로가 입을 열었다.그의 하얀 수염이 떨리는 입술을 따라 흔들렸다.“하지만 한 여인의 실종이이렇게까지 무림맹을 혼란케 할 줄은 몰랐군요.”그 말에 몇몇 장로가 히죽 웃었다.무린을 향한 비아냥이었다.“화란 도령께서 함께 계셨던 모양이지요?”또 다른 장로가 묘하게 음산한 말투로 덧붙였다.“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리면,사단이 나는 법이오.” 무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화란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청류가 사라졌다고무린 공자를 몰아붙이는 건 좀 치졸한.. 2025. 10. 8.
《혈룡기》 제12화 – “그 입술, 누구 것이었나요?” ──사랑은 침묵을 버티지 못한다. 무림맹의 회의당.고위 장로들과 각 파문 대표들이 자리를 채우고,중앙에는 무림맹주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긴장된 정적이 흘렀다.그 틈을 깨고문이 열렸다.무린.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온 건──화란이었다.청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엔 차가 식어 있었고,눈동자는 식지 않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무린과 화란은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했지만,청류의 눈엔 그것조차 부질없었다.화란의 입가에 떠오른 미세한 미소.무린의 목 아래로 엿보이는아주 희미한, 붉은 흔적.그 흔적이,청류의 가슴을 쿡 찔렀다.“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이젠 밤까지 함께한 거야?” “맹주님 도착하십니다!”함께 일어서는 사람들 속에서,청류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무린의 시선과 마주쳤다.그의 눈엔 죄책감.. 2025. 10. 8.
외전 – “너는 나를 택했다” ──화란, 그 밤의 끝에서 속삭이다. 밤이 깊었다.촉불은 이미 꺼졌고,달빛만이 덩그러니 방 안을 덮고 있었다.화란은 무린의 품에 안겨,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규칙적이면서도 미세하게 떨리는 맥박.그 안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를 바랐다. “너는 나를 택했다.”화란은 조용히 속삭였다.무린은 잠들어 있었고,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품은 따뜻했다.하지만 그보다 뜨거웠던 건──그녀의 심장이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나는 너의 심장이 멈춘 줄 알았어.하지만 오늘 밤…너는 끝내 내게 너를 맡겼지.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헝클어진 이불 사이에서자신의 속살을 매만지며 거울을 바라봤다.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어깨에 남겨진 입술 자국.그건 증표야.내가 널 꺾었고, 너는 무너졌다는 증표. “청류는.. 2025. 10. 8.
《혈룡기》 제11화 – 소유의 조건, 유혹의 칼날 ──사랑은 독이 되고, 질투는 불이 된다. 무림맹의 후정.홍등이 바람에 흔들릴 무렵,화란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붉은 술이 담긴 잔을 기울이며,그녀는 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 눈빛.그 입술.그리고──그의 몸에 남아 있던 청류의 향기. “입을 맞췄다더군.”그녀가 낮게 말했다.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하지만 눈빛, 말투, 그리고 분위기.여자는 안다.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무언가’를 나눴을 때를. 화란은 피식 웃었다.“나보다 먼저 했다고 해서더 깊었다는 보장은 없지.”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옷고름을 단단히 매고,가슴 앞에 두른 얇은 비단을 풀어내며 중얼거렸다.“좋아, 무린.오늘…내가 어떤 여잔지 보여줄게.” 그날 밤.무린은 청류의 치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그의 어깨는 여전히 붉게 부어 있었지만.. 2025. 10. 8.
《혈룡기》 제10화 – 죽음보다 가까운 숨결 ──칼끝보다 더 날카로운, 감정의 접촉. 무림맹 제3도서각.어둡고 눅눅한 공기 속에청류는 홀로 서 있었다.맹주가 비밀리에 보관한 고문서를 확인하라는 지시,그건 명령이기도 했고…어쩌면 감시이기도 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지난밤, 무린의 방 앞에서무언가가 '넘어갔다'는 걸.그리고 자신은…그 선을 넘지 못했다. 문서를 넘기던 순간,그녀의 등 뒤에서‘슥’ 소리가 났다.그리고──공기가 달라졌다.암기다. 몸이 반사적으로 튕겨졌다.그녀의 어깨를 스쳐간 작은 바늘 하나.그 순간,또 다른 그림자가 벽 너머에서 튀어나왔다.칼이 빠르게 목을 노렸다.청류가 검을 뽑았다.단칼.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세 명.아니, 네 명. “쯧.역시 혼자 보낸 건 실수였지.”그 목소리는──무린이었다.창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는아무 무기도 없이.. 2025. 9. 29.
《혈룡기》 제9화 – 불꽃과 얼음, 첫 대치 ──매혹의 칼날은, 검보다 날카롭다. 무림맹 안의 뒷뜰.달빛 아래, 향나무가 짙게 풍겼다.그곳에,화란이 서 있었다.붉은색 옷자락은 바람에 흩날리고,그녀의 어깨 너머엔은은하게 열꽃 문양이 살아 숨 쉬었다.그리고──그 앞에 청류가 나타났다.푸른 옷에 단정한 검.차가운 눈매는 밤빛에 더 선명했다. “네가 먼저 왔네, 청류.”“널 기다린 건 아니야.”화란은 웃었다.그 웃음엔,날카로운 독이 숨어 있었다.“무린에게… 향수 뿌렸지?”“……무슨 말이지?”“그 애가, 오늘 아침 내 방을 지나쳤을 때그 몸에서 너의 향기가 났어.” 청류는 잠시 숨을 멈췄다.그녀는 전날 밤,무린의 검 손질을 도와줬다.살결이 닿았고,그의 눈빛이 흔들렸고──그리고…짧은 순간이지만,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너무 귀를 기울이는군.”.. 2025.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