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맹 회의당의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탁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청류의 실종.
그 빈자리가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회의당은 점점 ‘정무’가 아닌 ‘정치’의 장이 되고 있었다.
“무인(武人)은 감정에 흔들려선 안 됩니다.”
백운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의 하얀 수염이 떨리는 입술을 따라 흔들렸다.
“하지만 한 여인의 실종이
이렇게까지 무림맹을 혼란케 할 줄은 몰랐군요.”
그 말에 몇몇 장로가 히죽 웃었다.
무린을 향한 비아냥이었다.
“화란 도령께서 함께 계셨던 모양이지요?”
또 다른 장로가 묘하게 음산한 말투로 덧붙였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리면,
사단이 나는 법이오.”
무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란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청류가 사라졌다고
무린 공자를 몰아붙이는 건 좀 치졸한 거 아닙니까?”
“이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녀가 떠나는 걸 막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왜 모든 책임을
그에게 지우려 하시죠?”
백운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화란 낭자.
그대는 그날 밤,
무린과 함께 있었지요?”
그 말이 떨어지자,
회의장은 정적에 잠겼다.
“청류 낭자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쓸쓸했을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그 밤을
불씨로 삼은 건 아닌지…
그리 생각한 자가 어찌 그대뿐이겠소?”
화란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무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청류의 실종,
그 원인이 제게 있다면…
그 대가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굴 비난하기보다
그녀를 찾는 데 집중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 목소리는 맑고 단단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고결한 결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벌주는 고백이었다.
화란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무린의 눈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던 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던 기억.
그 손에,
다른 여자의 잔열이 남아 있었던 걸
그녀는 이제서야 느낄 수 있었다.
“화란!”
무린이 따라 나서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어.”
그녀가 말했다.
“청류는 널 갖지 않았어도
너한테서 널 뺏을 수 있었어.”
“나는 널 가졌지만,
넌 나한테 없었어.”
무린은 말이 없었다.
그 말이 진실이었기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넌 그녀를 찾아야겠지.
그렇게 해.
하지만 돌아와선 안 돼.”
“너를 탐했던 건 나지만,
이젠 더럽혀지는 것도 싫어졌어.”
그녀는 사라졌다.
그렇게 무린의 곁에 있던
두 여인 모두,
자리를 비웠다.
며칠 후.
무림맹 회의실 안.
백운 장로는 또다시 무린을 지목했다.
“청류 낭자도 없고,
화란 낭자도 떠났습니다.”
“이 사내는 이제,
정무도, 감정도 다 잃은 자요.”
“이런 자에게
무림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요?”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금빛 도포에 붉은 천을 두른,
용안의 노장이었다.
“내가 맡지.”
그가 낮게 말했다.
“무림의 길,
지금부터는 내가 이끈다.”
그는 ‘철기루(鐵騎樓)’의 수장이자
무림에서 손꼽히는 권력자──‘풍백현(風白玄)’이었다.
무린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의 등 뒤로
검은 실루엣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그 실루엣은 검은 장삼을 입고,
안대를 하고 있었다.
청류…?
그럴 리 없었다.
그 인물은 청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인물이 입을 열자──
“무린 공자.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했다.
무림의 권력 구도는 다시 짜이고,
무린은 모든 것을 잃은 채
다시 싸워야 할 운명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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