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침묵을 버티지 못한다.
무림맹의 회의당.
고위 장로들과 각 파문 대표들이 자리를 채우고,
중앙에는 무림맹주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그 틈을 깨고
문이 열렸다.
무린.
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온 건──화란이었다.
청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엔 차가 식어 있었고,
눈동자는 식지 않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무린과 화란은
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했지만,
청류의 눈엔 그것조차 부질없었다.
화란의 입가에 떠오른 미세한 미소.
무린의 목 아래로 엿보이는
아주 희미한, 붉은 흔적.
그 흔적이,
청류의 가슴을 쿡 찔렀다.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이젠 밤까지 함께한 거야?”
“맹주님 도착하십니다!”
함께 일어서는 사람들 속에서,
청류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무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눈엔 죄책감이 있었다.
그게 더 치욕적이었다.
‘왜 미안해?
내가 아는 넌 그런 얼굴 하지 않았잖아.’
회의가 시작됐다.
문파 간의 경계 분쟁,
강 남쪽에서 일어난 마물 소문,
내부 장로 간의 이권 다툼.
하지만 청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차잔을 문질렀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청류는 차분한 듯 걸어 나갔다.
하지만 어깨는 굳어 있었고,
걸음은 너무 곧았다.
무린은 따라나섰다.
외정, 연못가.
청류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청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말해요.”
“…….”
“그 입술…
누구 것이었나요?”
무린이 숨을 멈췄다.
그녀는 돌아섰다.
그의 눈앞엔,
눈물이 맺히지 않은 슬픔이 있었다.
“그날 밤,
내가 지키지 못한 걸
다른 여자가 지켜준 거예요?”
“……청류.”
“아니면,
당신이 스스로 안긴 거예요?”
무린이 다가가려 하자
청류는 한 발 물러섰다.
“멈춰요.
지금 다가오면,
나는…
다신 당신을 안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무린은 멈췄다.
청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원했어요.
하지만 내 방식대로,
천천히…
내 마음이 먼저 가기를 원했어요.”
“화란은…
그 모든 걸 건너뛰고
몸으로 당신을 끌어냈죠.”
“그걸 알고도,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어요.”
무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변명보다 더 잔인했다.
청류는 웃었다.
입가만 움직이는 그런 웃음.
“좋아요.
그 여자는 용기 있었고,
나는 멍청했어요.”
“하지만 기억해요.”
“당신이 처음 입을 맞춘 여자는,
나였어요.”
“그리고 그때,
당신은 떨고 있었어요.
그건 진심이었어요.”
그녀는 등을 돌렸다.
이번엔 무린이 붙잡았다.
“청류.”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 손,
화란도 붙잡았던 손이죠?”
“그녀와 나 사이에
차이를 만들고 싶으면…
다음부턴 같은 방식으론 안 돼요.”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붙잡히지도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사라졌다.
무린은 혼자 남겨졌다.
그가 다시 회의당으로 돌아갔을 때,
장로들의 눈빛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여인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무림을 다스리겠나…”
그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화란이 다가왔다.
“다 괜찮아.”
“…….”
“그 여잔 울지도 않았잖아.
그 말인즉슨,
아직 포기 안 했다는 거야.”
무린은 고개를 들었다.
화란은 웃고 있었다.
“나는 절대 안 보내.
청류가 뭐라 하든 간에.”
그날 이후,
무림맹 안의 분위기는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류는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린은 두 여인을 안았다.
하지만 마음은 하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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