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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헙

《혈룡기》 제3화 – 봉인된 장롱 속 편지

by WhateverYouDo 2025. 9. 21.

진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피는 다 알고 있었다.

 

주막은 불타 사라졌다.
새벽빛이 마당 끝, 검게 그을린 돌기둥에 떨어졌다.

천무린은 아무 말도 없었다.
몸엔 타다 만 연기가 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손에 쥔 검은 피에 젖어 무겁게 느껴졌고, 가슴 안은 한없이 가벼웠다.

세 명의 시체는 태웠다.
그 중 한 명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
무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피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게 어릴 적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잊은 줄 알았던,
검을 휘두르던 꿈속 그 소년의 맹세.

 

무린은 남쪽 굽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는 누군가의 눈에 띄면 안 됐다.

몸은 피에 젖었고,
얼굴엔 그을음이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눈은 말갛게 떠 있었다.
어둠을 꿰뚫는 눈, 그건 더 이상 하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룡세가의 피였다.
그리고 그 피는,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살기와 맞닿아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온 그는 옛 절터에 도착했다.
취연촌 동쪽 너머, 풀숲에 파묻힌 절집 하나.

거기서 그는,
양어머니가 생전 한 번도 들여보내지 않았던 작은 방을 찾아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먼지 속엔 오래된 장롱 하나가 있었다.

손을 얹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이걸 지켜보고 있었던 느낌.

‘이걸… 왜 숨긴 거지?’

그는 힘껏 열었다.

철컥.
잠금쇠가 끊어졌고,
장롱 안엔 천으로 감싼 서류함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엔, 서찰이 다섯 장.

 

 

첫 장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도유모 백씨(白氏), 기원 253년 경성에서 파견.』

 

그 아래,
손글씨로 써 내려간 고백.

『나는 그날, 아이를 바꿨다.
울던 아이는 죽었고, 살린 아이는… 그 집의 것이 아니었다.』

『지시였다. 천룡의 피를 끊으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나는 죄를 지었다. 그 아이는 살았고,
지금…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무린은 손가락이 굳는 느낌을 받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의 손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난 버려졌던 거야.’

‘왜?’

‘무슨 이유로?’

그는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이번엔… 낯익은 필체였다.

양어머니의 글씨.
그가 어린 시절, 자주 보던 곱고 작은 글씨체.

『무린아, 너는 내 아들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널 안았던 그 순간부터 넌 내 아이였어.』

『내가 널 사랑했던 것, 그건 죄가 아니야.
네가 언젠가 이 편지를 보게 될 땐… 반드시 이 말을 기억해 줘.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네 피는… 진짜야.』

 

손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그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진 걸 느꼈다.

누군가… 근처에 있었다.

 

“여긴 숨어도 될 곳이 아닌데?”

여자의 목소리.
달빛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이 드러난 옷,
붉은 실로 수놓인 사파 문양.
그리고 미소.
그 미소가, 짐승 같았다.

“넌 누구지?”

무린은 칼을 들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웃었다.

“넌 이제 천룡의 피를 찾았겠지.
그리고… 피를 뿌렸겠지?”

“…넌 누군가의 첩자인가.”

“음~ 첩자라기보단… 관찰자? 혹은 사냥꾼? 혹은…”

그녀는 다가왔다.
눈빛은 촉촉했고, 손끝은 부드러웠다.

“…혹시, 너의 첫 여자?”

 

그녀가 말을 마치기 전,
무린은 벽을 등지고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화란.
사파의 지령을 받았고,
너를 죽이라 들었지.
그런데 널 보니까… 죽이긴 아깝네?”

무린의 눈이 가늘게 떴다.

 

“…도망쳐. 지금은.”

“아, 무서운 남자.”
그녀는 웃었다.
그 미소는, 피를 본 짐승의 미소였다.

“다음에 보자, 적장자.”

그녀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남은 건 편지와, 흔들리는 촛불.
그리고 뜨겁게 피가 도는 무린의 가슴.

그는 그 자리에서 꿇어앉았다.

‘나는 누구였고… 이제 누구여야 하지?’

그 물음의 끝에서,
그는 한 줄기 답을 찾았다.

나는 천무린이다.
그리고 나는, 이 피를 되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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