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가 울리면, 피가 사람의 이름을 지운다.
산능선 아래 골짜기.
안개가 낮게 깔렸다.
바람은 멈췄다.
종소리는 멎지 않았다.
무린이 칼을 쥐었다.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했다.
그러나 균열은 살아 있었다.
얼음과 불의 사이, 그 틈.
화란이 곁에서 숨을 고르고 속삭였다.
“오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불씨가 튀었다.
붉은 꽃.
금방이라도 피바다로 번질 준비.
먼저 나타난 건 무인들이 아니었다.
검은 망토.
붉은 눈.
피와 쇠로 빚은 혈사(血師).
그들은 살갗 대신 쇠사슬을 몸에 감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종의 잔향이 사슬 사이로 스며들었다.
인간의 기척이었으나, 인간의 향이 아니었다.
앞선 혈사가 철퇴를 바닥에 끌며 중얼거렸다.
“명(命) : 천무린.”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었지만,
입안에서 피가 먼저 울었다.
무린이 한 걸음 나섰다.
“먼저 묻겠다. 너희는 이름이 있나.”
혈사는 고개를 젓는 대신,
쇠사슬을 당겨 대답했다.
사슬과 종이 동시에 울렸다.
“명(命)만 있다.”
그리고 달려왔다.
첫 타.
철퇴가 공기를 찢었다.
무린은 빙심으로 한 발 비켜섰다.
얼음판이 얇게 깔리며 사슬의 속도를 반 자 죽였다.
바로 이어 염화가 겹쳤다.
열과 냉.
두 겹의 충격이 한 점에서 부딪쳤다.
콰앙—!
혈사의 팔뚝이 비틀리며 뒤로 젖혀졌다.
그러나 떨어진 피가 땅에 닿기도 전에,
사슬이 피를 끌어올려 상처를 봉합했다.
피가 돌아왔다.
사람이 아닌, 쇠의 이치로.
“피를 먹는다…”
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피를 얼리면 된다.”
그는 검을 기울였다.
빙심·쇄설(鎖雪).
서릿발이 사슬의 구멍마다 박혔다.
사슬이 울음을 삼켰다.
움직임이 반 토막.
그 틈.
화란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꽂혔다.
홍염낙화.
불꽃이 얼음 위에서만 피어나도록 조절된 화.
얼음이 깨지는 순간에만 폭발하도록 묶인 불.
쾅—!
혈사 한 명이 그대로 뒤집혔다.
붉은 눈이 꺼졌다.
그러나 곧, 뒤가 밀려왔다.
세, 다섯, 열.
혈사들이 동시에 사슬을 바닥에 꽂아 원을 만들었다.
피가 바닥 문양으로 흘러들어갔다.
즉석 납혈진.
화란이 이를 갈았다.
“진을 펼치네. 바닥이 그들의 혈관이야.”
무린은 바닥에 검끝을 갖다 댔다.
심장이 한 번 크게 울렸다.
균열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그럼 혈관을 얼리자.”
빙심·지맥빙결.
차가운 기운이 돌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닥 문양을 따라, 진의 혈맥을 정지시켰다.
혈사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삐걱거렸다.
마치 잘못 맞춘 인형처럼.
그 틈에 화란이 뛰어들었다.
불꽃이 화살처럼 터졌다.
염화·련쇄(連鎖).
불이 사슬을 타고 번졌다.
얼어붙은 사슬 위에서만 타오르는,
상극을 합궁시킨 화.
비명은 없었다.
대신 종소리가 깨졌다.
앞줄이 무너졌다.
그러나 뒤쪽에서 더 큰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사슬이 허리께 굵게 감긴 자.
한쪽 눈에 **쇄인(鎖印)**을 그대로 박은 채,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혈사장(血師長) 강운(江雲).
명 : 천무린, 포획.”
그의 눈동자 안쪽에서
청류의 안쇄와 닮은 문양이 번쩍였다.
무린의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너의 쇄… 어디서 가져온 거지.”
혈사장은 대답 대신 사슬을 던졌다.
사슬은 허공에서 칼날로 변했다.
솟구친 피가 즉석에서 형상을 빚어,
붉은 검이 되었다.
부딪침.
한 번.
두 번.
셋.
무린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이 뒤틀렸다.
균열이 벌어질수록 힘은 세졌지만,
대가도 함께 커졌다.
화란이 뒤에서 불을 얹었다.
“내가 널 밀어. 심장은 내게 맡겨!”
그녀의 손바닥이 무린의 척추에 닿았다.
불씨가 균열을 감싸며,
폭발의 각을 바깥쪽으로 꺾었다.
무린이 일보 전진.
칼끝이 낮게 그었다.
균열검·파쇄(破鎖).
열과 냉을 시간 차로 건다.
먼저 얼리고, 반 박자 늦게 태운다.
쇠는 열팽창과 냉수축 사이에서 찢어진다.
쾅—쾅—쾅!
혈사장의 허리 사슬에 금이 갔다.
그의 눈동자 문양이 한 번 깜빡였다.
거기… 아주 얇은 흰 금.
무린의 가슴이 저려왔다.
청류의 눈에서 보았던 그 금.
같은 설계. 같은 손길.
풍백현의 쇄는, 모든 족쇄를 하나의 울림에 묶는다.
“종을… 끊어야 해.”
혈사장이 허공에 보이지 않는 종을 울렸다.
소리가 아니라, 진동.
뼈로 들리는 울림.
무린의 귓속에서 피가 끓었다.
균열이 뒤집혔다.
힘이 밖이 아니라, 안으로 터지려 했다.
“크…!”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한 번 하얗게 날아갔다.
그때 화란이 그의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여기.
내 불을 잡아.”
짧은 체온.
짧은 밤의 기억이 겹쳤다.
그 온도가 균열의 가장자리로 달려가 폭발을 꺾었다.
무린이 이마를 들었다.
피투성이였지만, 웃었다.
“잡았다.”
그는 칼을 옆으로 눕혀 쓸었다.
균열검·역(逆).
울림을 거꾸로 건다.
바깥의 종이 안을 울리면,
안의 심장이 밖을 울리게 만든다.
심장이 한 번 크게 쿵.
바닥의 얼음이 공명했다.
얼음의 공명이 사슬을 타고 혈사장의 눈으로 치솟았다.
째앵—!
쇄인이 금 가며 빛을 흘렸다.
혈사장이 순간적으로 눈을 감췄다.
바로 그 한 호흡.
무린이 파고들었다.
칼끝이 사슬과 살의 경계,
쇠와 피의 경첩을 노렸다.
빙심·정(釘).
얼음 못을 박듯.
화란의 불길이 그 못에 불을 붙였다.
염화·발화(發火).
못이 폭발하며 사슬을 안에서 찢었다.
콰과광—!
혈사장이 뒤로 날아갔다.
한쪽 눈의 문양이 꺼졌다.
붉은 검에 맺힌 피가 땅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사슬이 끌어올리지 못했다.
얼어 있었다.
—
뒤편 혈사들에 동요가 번졌다.
그들의 사슬이 일제히 미세하게 흔들렸다.
종의 울림이 어긋났다.
쇠의 질서가 흔들리는 순간.
무린은 심장을 움켜쥐고 다시 섰다.
숨이 거칠었고, 시야는 흔들렸다.
그러나 발은 앞으로만 갔다.
“쇠는 완전하지 않다.”
그가 말했다.
“쇠를 묶는 건 종.
종을 묶는 건 심장.
심장을 묶는 건—”
그는 화란을 스쳤다.
“불이다.”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겹쳤다.
빙심·염융(炎融) : 균열장.
얼음과 불이 맞물려 거대한 장막을 만들었다.
밀려드는 혈사들의 발밑에서 얼이 솟고,
그 위에서만 불꽃이 터졌다.
길이 열렸다.
살아 있는 자만 지나갈 수 있는 길.
혈사들이 무너졌다.
그들의 피는 얼어 붙었고,
사슬은 열과 냉 사이에서 개 같은 비명을 질렀다.
고요.
안개가 늦게서야 돌아왔다.
피 냄새보다 서리가 먼저 코를 찔렀다.
무린이 칼끝을 내렸다.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는 한쪽 무릎을 짚고 숨을 뱉었다.
입안에 철 맛.
화란이 급히 안았다.
“괜찮아?”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 위를 눌렀다.
불이 미세하게 떨며 균열의 가장자리를 봉합했다.
“괜찮아.”
무린이 웃었다.
“살아 있어.”
그는 쓰러진 혈사장을 바라봤다.
눈동자의 꺼진 반쪽에,
아주 얇은 빛 점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흔적.
청류의 금빛처럼.
무린의 속이 서늘하게 식었다.
“혈사들의 사슬과, 청류의 쇄는… 같은 종에서 울린다.”
그때, 산 아래에서 또다른 울림.
이번 건 더 낮았다.
더 깊었다.
땅속에서, 무덤의 밑바닥에서 울릴 법한 소리.
화란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이건 달라.”
안개가 가르어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 올라왔다.
사슬 수십 줄이 몸통을 감아 만든 갑옷.
검은 깃발이 바람도 없이 펄럭였다.
붉은 눈 하나, 꺼진 눈 하나.
혈사장 위의,
혈후(血侯).
그가 종을 들지도 않았는데,
땅 자체가 울었다.
“명 : 천무린.
구속(拘束).”
무린은 천천히 일어섰다.
칼을 거꾸로 쥐었다.
심장이 여전히 불규칙했지만,
그 불규칙이 이제는 박자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첫 전장이라면, 첫 왕도 있어야지.”
화란이 그의 옆에 섰다.
불꽃이 다시 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웠고, 뜨거웠다.
그러나 입술은 단단했다.
“끝까지 간다.”
혈후가 사슬을 들어 올렸다.
전장은, 진짜로 시작이었다.
종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혈사는 쓰러졌고, 혈후가 올라왔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은,
여전히 한 사람의 심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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