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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20

《혈룡기》 제25화 – 떠나는 길, 찾는 길 쇠에 묶인 세상을 풀기 위해, 두 사람은 다시 길에 올랐다. 무림맹 장로회의 파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찬성과 반대, 반역과 지지.무린은 맹주를 자처하며 서 있었지만,그 발밑은 이미 피와 서리, 불길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알았다.이곳에서 더 버티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힘을 더 갈아올려야 했다.쇠를 부술 수 있는, 압도적인 힘. 밤.무린과 화란은 몰래 무림맹을 빠져나왔다.달빛조차 흐려, 두 사람의 그림자는 희미했다.“정말 가는 거야?”화란이 물었다.그녀의 음성은 낮지만, 내심 설렘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납혈진을 완전히 무너뜨릴 방법을 찾으려면…다시 기연을 찾아야 한다.” 화란은 그를 곁눈질했다.그의 옷자락은 아직도 피로 젖어 있었고,손끝의 서리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그러나 .. 2025. 12. 15.
외전 – “너는 나를 택했다” ──화란, 그 밤의 끝에서 속삭이다. 밤이 깊었다.촉불은 이미 꺼졌고,달빛만이 덩그러니 방 안을 덮고 있었다.화란은 무린의 품에 안겨,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규칙적이면서도 미세하게 떨리는 맥박.그 안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를 바랐다. “너는 나를 택했다.”화란은 조용히 속삭였다.무린은 잠들어 있었고,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품은 따뜻했다.하지만 그보다 뜨거웠던 건──그녀의 심장이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나는 너의 심장이 멈춘 줄 알았어.하지만 오늘 밤…너는 끝내 내게 너를 맡겼지.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헝클어진 이불 사이에서자신의 속살을 매만지며 거울을 바라봤다.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어깨에 남겨진 입술 자국.그건 증표야.내가 널 꺾었고, 너는 무너졌다는 증표. “청류는.. 2025. 10. 8.
[외전] 화란 – 붉게 피어난 독화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밤하늘엔 별이 없었다.그리고 화란의 눈에도… 감정은 없었다.그녀는 조용히,무림맹의 훈련장을 내려다보았다.아래엔 천무린과 청류.두 사람은 나란히 검을 쥐고 있었다.서로를 향해 웃으며,한 치의 거리 없이 마주 서 있었다.그 장면은──그녀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검을 그렇게 가까이 겨누면… 숨결까지 닿지."화란은 중얼이며 술잔을 비웠다.하지만 쓴 건 술이 아니라,씹히지 않은 질투였다.그녀는 참으려 했다.애써 웃으려 했다.그저 흔한 장면이라고,그가 나를 안았던 밤을 기억하자고,마음을 되뇌었다.하지만──그녀는 ‘한 번’ 키스를 받았고,청류는 매일 그와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밤.화란은 검은 옷을 걸치고,무림맹의 무고한 사제 하나를 끌어냈다.“……화란님, 무슨 일이십니까.”“.. 2025. 9. 29.
《혈룡기》 제6화 – 사파의 붉은 꽃 ──질투는 독이다. 하지만 달콤하다. 달빛은 흐렸고, 바람은 뜨거웠다.무림맹 연회가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밤.천무린은 산 속 폐관에 머물고 있었다.외부와 단절된 곳.숨은 고수를 찾기 위함도, 수련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그는 단지 피하고 싶었다.청류의 눈.그 눈빛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냉정하고, 맑고,하지만 어딘가 갈라져 있던 시선.그 시선이…그의 심장을 스친 후부터, 무언가 흔들리기 시작했었다. 그러나,그가 머물고 있는 산장에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나뭇잎을 스치는 가벼운 발소리.향긋한 바람에 실려오는 꽃내음.그리고… 화란. 그녀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열쇠도 필요 없었다.이 남자가 문을 잠글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방 안에는 불빛 하나,그 빛 아래 앉아 있던 무린의 등 뒤에 그녀는 서.. 2025. 9. 29.
[외전] 청류 – 검보다 날 선 시선 ──심장은 흔들렸지만, 눈은 부정하고 있었다. 무림맹 연회.정파와 사파, 황실의 그림자까지 드리우는연중 단 한 번의 무림 공정(公正)의 밤.여기 모인 자들은 전부 고위 가문, 대문파의 후계자들이었다.검이 아닌 피로 증명되는 자리.명분보다 배경과 정치력이 더 중요한 밤. 그날 밤,청류는 하늘색 옥갑(玉甲)을 걸치고 등장했다.정갈한 검은 머리를 높게 묶고, 정파 3대 무공 중 하나인 '청명류풍검법'의 상징인 푸른 인장을 달고 있었다.눈빛은 차가웠고,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맹주의 딸이다.”사람들이 속삭였다.“청류 소협이래.” 연회장 뒤편,하인처럼 검은 옷을 걸치고 벽을 등지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천무린.그는 이름을 숨기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숨어 있었다.손엔 잔이 들려 있었고,눈은 연회장 중앙을 조.. 2025. 9. 29.
[외전] 화란 – 칼날 위 입술 ──칼보다 날카로운 건, 여자의 입술이다. 비가 내렸다.창문 틈으로 스며든 물비린내.세상은 젖었고, 무림은 조용했다.무린은 홀로 앉아 있었다.구천객잔.낡은 목재 의자, 삐걱거리는 천장, 식지 않은 술 한 사발.그는 취하지 않았다.술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머리까지 닿지 않았다.머릿속은 아직… 천룡세가의 대문 앞에 있었다.“적장자? 웃기지 마라.” 그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돌.피.자존심.그의 이마엔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고,그 눈빛은 더 깊어져 있었다. 그때,문이 열렸다.바람처럼.아무 소리도 없이.그리고 그 문턱을 넘어선 건… 화란.검은 우비, 붉은 허리끈.머리는 젖었고, 눈은 젖지 않았다.“또 혼자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그 속엔 짓궂음과 연민, 갈증이 섞여 있었다.무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2025.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