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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쇄에 묶인 심장 몸은 쇄에 갇혔으나, 마음은 아직 그를 기억했다. 고요했다.납혈진이 절반 무너졌을 때, 잠시 빛이 스며들었다.그러나 지금, 다시 어둠뿐이었다.나는 쇠사슬에 묶인 채 무릎 꿇고 있었다.눈동자에 박힌 안쇄가 여전히 불타고,심장은 심쇄에 눌려 고동이 느리게 울렸다.혈맥은 혈쇄에 잠겨, 내공조차 흐르지 않았다.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숨결마저 종소리에 흔들렸다. 풍백현의 발자국은 멀어지고,화란의 불길은 사라졌다.남은 건 내 안에 파고든 정적.그런데도,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청류… 반드시 널 데리러 온다.”무린의 목소리였다.그가 떠나며 남긴 마지막 속삭임.쇠가 내 귀를 막아도,그 말은 여전히 가슴을 울렸다. 눈을 감았다.안쇄가 빛을 막아도,내 안쪽에서 떠오르는 장면까지 지우지는 못한다.어린 날의.. 2025. 12. 15.
《혈룡기》 제25화 – 떠나는 길, 찾는 길 쇠에 묶인 세상을 풀기 위해, 두 사람은 다시 길에 올랐다. 무림맹 장로회의 파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찬성과 반대, 반역과 지지.무린은 맹주를 자처하며 서 있었지만,그 발밑은 이미 피와 서리, 불길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알았다.이곳에서 더 버티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힘을 더 갈아올려야 했다.쇠를 부술 수 있는, 압도적인 힘. 밤.무린과 화란은 몰래 무림맹을 빠져나왔다.달빛조차 흐려, 두 사람의 그림자는 희미했다.“정말 가는 거야?”화란이 물었다.그녀의 음성은 낮지만, 내심 설렘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납혈진을 완전히 무너뜨릴 방법을 찾으려면…다시 기연을 찾아야 한다.” 화란은 그를 곁눈질했다.그의 옷자락은 아직도 피로 젖어 있었고,손끝의 서리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그러나 .. 2025. 12. 15.
《혈룡기》제13화 – 누가 무림을 이끌 자격이 있는가 무림맹 회의당의 공기가눈에 보일 만큼 탁했다.며칠째 이어지는 청류의 실종.그 빈자리가 사람들의 혀끝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회의당은 점점 ‘정무’가 아닌 ‘정치’의 장이 되고 있었다. “무인(武人)은 감정에 흔들려선 안 됩니다.”백운 장로가 입을 열었다.그의 하얀 수염이 떨리는 입술을 따라 흔들렸다.“하지만 한 여인의 실종이이렇게까지 무림맹을 혼란케 할 줄은 몰랐군요.”그 말에 몇몇 장로가 히죽 웃었다.무린을 향한 비아냥이었다.“화란 도령께서 함께 계셨던 모양이지요?”또 다른 장로가 묘하게 음산한 말투로 덧붙였다.“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이성보다 감정에 휘둘리면,사단이 나는 법이오.” 무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화란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청류가 사라졌다고무린 공자를 몰아붙이는 건 좀 치졸한.. 2025. 10. 8.
《혈룡기》 제12화 – “그 입술, 누구 것이었나요?” ──사랑은 침묵을 버티지 못한다. 무림맹의 회의당.고위 장로들과 각 파문 대표들이 자리를 채우고,중앙에는 무림맹주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긴장된 정적이 흘렀다.그 틈을 깨고문이 열렸다.무린.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온 건──화란이었다.청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엔 차가 식어 있었고,눈동자는 식지 않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무린과 화란은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했지만,청류의 눈엔 그것조차 부질없었다.화란의 입가에 떠오른 미세한 미소.무린의 목 아래로 엿보이는아주 희미한, 붉은 흔적.그 흔적이,청류의 가슴을 쿡 찔렀다.“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이젠 밤까지 함께한 거야?” “맹주님 도착하십니다!”함께 일어서는 사람들 속에서,청류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무린의 시선과 마주쳤다.그의 눈엔 죄책감.. 2025. 10. 8.
외전 – “너는 나를 택했다” ──화란, 그 밤의 끝에서 속삭이다. 밤이 깊었다.촉불은 이미 꺼졌고,달빛만이 덩그러니 방 안을 덮고 있었다.화란은 무린의 품에 안겨,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규칙적이면서도 미세하게 떨리는 맥박.그 안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를 바랐다. “너는 나를 택했다.”화란은 조용히 속삭였다.무린은 잠들어 있었고,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품은 따뜻했다.하지만 그보다 뜨거웠던 건──그녀의 심장이었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나는 너의 심장이 멈춘 줄 알았어.하지만 오늘 밤…너는 끝내 내게 너를 맡겼지.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헝클어진 이불 사이에서자신의 속살을 매만지며 거울을 바라봤다.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어깨에 남겨진 입술 자국.그건 증표야.내가 널 꺾었고, 너는 무너졌다는 증표. “청류는.. 2025. 10. 8.
《혈룡기》 제11화 – 소유의 조건, 유혹의 칼날 ──사랑은 독이 되고, 질투는 불이 된다. 무림맹의 후정.홍등이 바람에 흔들릴 무렵,화란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붉은 술이 담긴 잔을 기울이며,그녀는 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 눈빛.그 입술.그리고──그의 몸에 남아 있던 청류의 향기. “입을 맞췄다더군.”그녀가 낮게 말했다.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하지만 눈빛, 말투, 그리고 분위기.여자는 안다.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무언가’를 나눴을 때를. 화란은 피식 웃었다.“나보다 먼저 했다고 해서더 깊었다는 보장은 없지.”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옷고름을 단단히 매고,가슴 앞에 두른 얇은 비단을 풀어내며 중얼거렸다.“좋아, 무린.오늘…내가 어떤 여잔지 보여줄게.” 그날 밤.무린은 청류의 치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그의 어깨는 여전히 붉게 부어 있었지만.. 2025. 10. 8.